해가 지고 더이상 걸을 수 없을 때까지 걷고, 오늘 보고 겪은 모든 일이 꿈으로 넘어가지 않게 오늘 나의 발걸음을 뒤적거리며 그릴 만한 것을 찾는다. 하루의 경험, 하루의 깨달음, 하루의 추억이 없이, 나를 자극하는 것들, 위선 가득한 사람들, 쓰레기, 창밖의 소음, 부드러운 고양이와 강아지, 주고받은 편지, 아스팔트의 요철, 신호등의 깜박거림 없이, 끼어드는 차들, 뜨거운 태양, 신발을 적시는 빗물, 너무 많은 계단, 불편한 뉴스, 어색한 인사 없이. 그림이 무엇이 될 수 있겠는가.
어떤 날은 그냥 지나가고, 그냥 지나가는 날도 화면 위에 머뭇거림으로 남는다. 먼지처럼, 스크레치처럼, 부스러기처럼. 그리고 마침내 형태만 겨우 알 수 있는 무언가가 등장한다. 결국 어떤 인간에게는 세상이 그렇게 남는 걸까. 내가 그림으로 남기고 싶은 것은 그리 대단한 것들이 아니다. 그림으로 누군가를 움직일 수 있다면 그건 그림 뒤에 드리워진 수많은 걸음, 발끝에 차인 휴지 조각들, 그리고 그 휴지 조각의 원인들 일 것이다.
모험의 날들이 모여 걸어가는 길이 된다. 그것이 선명하게 남을 나만의 길일 것이다. 발끝으로 경험하고 손끝으로 기록하는 길. 과거에 연연하지 않으며, 미래를 장담하지 않는 지금, 내가 그리고 싶고, 내 마음을 끌어당기는 것은 바로 지금에 충실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뿌듯함과 감동이다. 그리고 이 충만함은 역설적이게도 앞서 말했듯 발끝에 차인 휴지 조각과 같은 것이다. 현실 속에서 나를 스쳐간 것. 그리고 불시에 나를 만나 타버린 것들이다.
때때로 지독한 하루를 보내고 그려야 하는 세상, 이토록 엉망인 이 세상도 종이 위에 그리면 ‘그저 그림일 뿐이다’ 라는 사실이 나를 크게 위로했다. 그림 속 세상은 내가 꿈꾸던 세상이 아니다. 밤에 나는 꿈도 꾸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