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극히 평범한 한국의 가부장적인 우리 가족의 기준점은 엄마였습니다.
제각각의 삶에 충실하고, 자유롭게 지내는 가족구성원 중에 엄마만이
”기준!“하고 한 팔을 치켜든 조회 시간의 그 아이처럼 숨죽이며 움직이지도 않고 그 자리서 늘 묵묵하셨습니다. 그러던 엄마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운동을, 장구와 민요를, 그림을 배우러 다니느라 꿈틀하면서 가족들은 잠깐, 약간의 예상치 못한 번거로움들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엄마의 움직임은 누구에게나 추천할 만큼 건강하고 건전하였으나, 감당해야할 번거로움에 가족들은, 기준이었던 그 자리로 엄마가 다시 돌아오길 바라는 이기적인 강요를 은근히 내비치기도 했고, 그런 저 자신을 바라보며 환멸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환상 속의 어머니상을 우리 엄마들에게 강요합니다. 아기였을 때도, 다 자란 성인이 된 후에도 우리는 단유를 거부합니다. 어떤 집은 엄마가 단유를 거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슬기로운 가족생활은 그야말로 판타지 속에서나 가능한 일입니다.

모자상, 모녀상으로 작업을 하려고 이미지를 찾는데,
자꾸 성모자상만 나와서(세상에 모녀상은 정말 희귀할 정도입니다!) 공부를 해보았습니다.
마리아님은 기독교에서 제시하는 가장 바람직한 여인, 어머니의 모습입니다.

처녀의 몸으로 예수를 잉태한 이후 말없이 예수의 곁에서 묵묵히 수발을 들고 사람들 앞에서 면박을 주는(마르코복음 3장 31-35절, 마태오복음 12장 46-50절) 아들 예수가 죽을 때까지 곁을 따르는 여인이지요. 마리아 이전의 여신들은 말도 많고 능동적이며 인간들만큼 성격이 다양했다고 합니다. -제가 그린 일상화에 나오는 고양이 신의 자리는 원래 하늘의 여신 누트(Nut) 자리입니다. 그녀도 굉장히 능동적인 신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유교의 현모는 ’임신과 동시에 아이에게 헌신적이고, 말없이 순종적으로 수발드는 마리아님‘과 더불어 바람직한 어머니의 모습으로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스며들었습니다.
현실은, 제 주변의 출산을 경험한 여성들 대부분은 임신, 출산으로 인한 신체 변화와 호르몬 문제를 온몸으로 견디고 겪어내며 자괴감에 빠진 적이 많다고 고백합니다. 막 낳은 아이에게 사랑이 솟구치치 않는 자신이 잘못된 것은 아닌지, 너덜너덜해진 몸이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 등이 우선하는 것이 맞는지 복잡했었다고요. 그러다 아이를 키우며 모성도 생기고 책임감도 커졌다고 합니다. 당연히 모든 모체가 출산과 동시에 마리아님 같은 어머니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어찌 되었든 우리는 어떤 어머니든 어머니의 뱃속에서 나와 마치 맡겨 놓은 것을 찾는 것처럼 이것저것 요구하고 받아내고 수저 타령하기 바빴습니다. 그렇게 살다 관성에 젖어 어머니들도 다 자란 아이들에게 독립을(경제적, 정서적) 못(안)하는 경우가 많아지기도 했습니다. 복잡하고 징그럽게 얽혀있는 이 관계는 너무 진부하지만 누구도 쉽게 인정하고 개선하길 꺼리기도 합니다. 세상에선 아이를 낳으라고 강요하지만, 사실 아이를 낳는 것이 마음만으로 가능한 일도 아니고 생태학적으로 보면, 육아가 어려운 환경에서 출산을 꺼리는 것은 생명의 본능이기도 합니다. 어렵게 낳고 키운 많은 아이들이 사건, 사고, 재난, 재해로 많이 희생되고 있는 요즘입니다. 모든 아이들은 예수님만큼 소중하고 귀합니다. 어른들의 잘못으로 아프고 힘든 아이들이 없길, 그리고 다 자란 아이들은 알아서 단유하고 엄마를 기준으로 두지 않아도 가족의 울타리가 사랑으로 견고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길 바랍니다.

글을 다시 읽어 보니 제가 마치 유교의 현모, 마리아님을 비판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많은 다양한 모습의 어머니들과, 그 분들이 낳은 아이들이 건강하게 잘 살길 바라는 마음으로 한 작업입니다. 이 작업을 제 엄마를 생각하며 했지만, 정작 이 작업하는 동안 얼마나 많은 짜증을 엄마에게 부렸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한 팔 곧게 치켜들고 기준! 하고 있는 엄마의 팔을 내리고 기준에서 ”땡“시켜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제그만 단유하고, 진심으로 엄마를 사랑하고 응원하는 딸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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