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그문트 바우만의 <액체 근대>에서 고체는 견고하고 안정적인 반면 액체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고체적이고 예측과 통제가 가능한 시대에서 변화와 흐름, 불안정이 지배하는 시대로 이동해왔다. 현대를 살고 있는 지금 나를 둘러싼 ‘공간’에 대한 나름의 정의를 내리고, 그에 대한 느낌과 감응을 점, 선, 면, 색 등의 조형언어를 통해 표현하고 있다.

우리는 ‘시각’과 ‘지각’이라는 단어를 구분해서 사용하기도 하지만 경우에 따라 ‘시지각’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만큼 시각과 지각은 떼어 낼 수 없을 정도로 서로 긴밀히 영향을 주고받기 때문일 것이다. 시각 즉 ‘본다’는 것은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우며 생리적인 일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본다는 것은 그동안의 경험과 기억을 동원하여 이미지를 보는 것이다.

자의에 의해 혹은 타의에 의해서 우리는 일상을 통해 많은 것을 보고 경험하게 되며 그것들은 나에게 단순화된 하나의 파편, 단편적인 이미지로 저장된다. 내가 수집하는 이미지들은 특정 공간의 내부/외부, 즉 건축적 이미지들이다. 사실적 이미지들은 디지털기기(포토샵, 아이패드 드로잉 등)를 통해 단순화, 변형, 왜곡, 편집 등의 과정을 거쳐 점, 선, 면, 색 등의 패턴을 만들어낸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한 개인으로서 특정 공간에 대한 소유와 정착보다는 이동과 유목의 의미로 공간에 대해 사유한다. 공간은 견고하고 지속적이며 안정적인 것 같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형되고 결국엔 소멸될 수도 있다. 나에게 공간은 물리적인 개념보다 심리적인 개념, 정착보다는 이동과 변화의 의미가 더 크다. 이러한 점에서 공간이라는 개념은 액체적이다. 공간은 끊임없이 이동하고 변화하며 유연한 흐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예민하고 날카로운 조각과 둥그스름하며 넓직한 조각, 천천히 유영하는 듯한 조각과 재빠르게 이동하는 조각 등. 작품 속에서 등장하는 조각들은 모두 다른 생김새와 속도를 가지고 나름의 방향대로 흘러가고 있다. 또한 주로 사용하는 색패턴은 기억과 경험에 의해 오랜 시간 동안 나의 신체에 체득되고 감응된 것들에 대한 표현이다. 파스텔톤의 색과 형광톤의 색은 나를 둘러싼 공간이 주는 안정감과 동시에 도시의 불빛과 네온사인으로부터 발광하는 색채에서 오는 불안정한 감정을 상징하고 있다. 작가 본인의 ‘내적 필연성’에서 우러나오는 형태와 색채로 화면을 채우고 있다.
평평한 공간에서 부유하는 파편들, 리드미컬한 선들과 첨예하고 날카로운 조각들은 새로운 공간에 대한 확장을 위해 계속해서 움직이고 이동하며 서로 충돌한다. 이 조각들은 그동안 네모진 캔버스 안에서 비좁게 이동 운동을 해왔다. 최근 작업에서는 움직임과 이동하는 공간에 대한 확장된 표현을 위해 캔버스 안에서 등장하던 기하학적 도형들이 캔버스 밖으로 나오게 된다. 그것들은 변형된 조각 캔버스로 또는 일상 속 오브제들의 변형을 통해 전시장 벽과 바닥에 놓여진다.

그동안 작업에 있어 주체는 회화, 오롯이 나의 작품이었다. 벽면에 걸린 캔버스 주변으로 오브제들이 함께 놓이게 되면서 전시의 3요소인 관람자-회화-공간이 모두 작품의 주체가 되도록 전시 공간을 활용하게 됐다. 나의 전시에서는 캔버스들이 더 이상 일렬로 반듯하게 화이트 큐브를 메우지 않는다. 이 그림 다음 저 그림을 봐야 한다는 일련의 정해진 순서도 없다. 각자의 시지각에 의한 선택과 판단, 그리고 탐색으로 다음 그림 혹은 다음 오브제를 선택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그래서 전시장에서 관람자들의 이동 경로는 저마다 모두 다를 것이다. 메인 캔버스를 바탕으로 조각 캔버스들이 여기저기 부유하고 움직이거나 또는 오브제가 함께 놓이면서 작품과 작품 사이, 공간과 공간 사이의 간극이 생기게 된다. 이것은 관람자들의 이동과 동선을 통해 작품 사이의 빈 공간들이 채워지며 연결되게 된다.
이렇듯 나의 작품은 잘 완성된 회화 한 점이 아니라, 전시의 3요소인 관람자-회화-공간이 모두 작품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또한 더 이상 수동적 감상의 공간이 아닌 능동적 체험의 현장이 된다.
_양승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