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epoch, 世)’는 지질학에서 지질학적 사건을 중심으로 연대를 결정하는데 쓰이는 시간 구분단위이다. ‘인류세(Anthropocene, 人類世)’는 인간 활동이 환경이나 지구 역사에 영향을 주기 시작한 시기부터 현재까지의 시간을 지칭한다. <인류세의 내일>에서 인간의 힘으로 자연이 돌이킬 수 없는 지점까지 변한 암울한 미래를 가상공간을 통해 만들어내려 시도하였다. 분명 우리는 그런 종말을 막기 위해 여러 노력을 기울이는 한편, 엔터테인먼트 요소로 소비하기도 한다.
현실에서 재난의 지속적인 출현은 종말에 대해 소설 취급 했던 것이 진지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가공하는 다양한 매체들은 대중적 흥행을 목표로 종말 서사를 세련되게 다듬는다. 그러한 코드를 가진 소비물들이 재생산 되는 데는 수요자들의 니드와 맞아떨어져서이기도 하다. 아드레날린이 솟는 긴박한 상황과 일상의 전복은 관객 혹은 독자들로 하여금 해방감을 주기도 한다. 화성인의 침공으로 인류가 위기에 처하는 내용의 소설 <우주 전쟁>(H.G. Wells, 1898)이 나왔을 당시에 영국 사회는 억압된 사회 구조로 계층 간의 갈등이 폭발하고 있었다. 동시대에 재난에 대한 접근이 진지하면서도 유희적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집단적인 심리에 영향 받았을 수 있다.

사이언스 픽션의 하위 장르로 인간 문명의 붕괴를 담는 포스트 아포칼립스와 디스토피아가 있다. 과거에 마이너한 영역에서 머물렀던 이 둘은 사회적으로 환경이 큰 이슈가 되면서부터 독자의 층이 확장 되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는 문명과 사회가 사라진 암울한 세계가 배경이다. 디스토피아라는 비슷한 장르와 달리 고도화된 문명의 자리를 자연이 대신 차지한다. 인적이 사라진 고요하고 한적한 이 ‘내일’은 파괴와 재난에 포커스가 맞춰진 재난 영화와 다르다. 오히려 모든 게 다 쓸려간 이 풍경은 인류 역사가 태동하기 시작한 시대와 통한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는 적당한 거리가 있었고 그 사이엔 자연만 있었던 태고의 세계는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세계와 유사하다. 그곳엔 갈등도 화해도 단죄도 없으며 단지 사라진 인류와 문명에 대한 연민과 노스탤지어만 남아 있다.
_작가노트

김도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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