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데이터의 변환 : 3'_김채원 Kim Chaewon_2020.7.31-8.14

<3′>, 녹음된 데이터베이스로부터 변환된 다수의 악보와 편곡된 피아노 사운드 그리고 백마스킹 된 소리, 가변설치, 2020

작가 본인은 장소를 선정하여 데이터를 수집하고 그 데이터베이스를 기반으로 장소에 대해 작업한다. 이 작업은 대한민국 전라북도 k군에 위치한 교회에 대한 리서치 작업이며, 2018년도부터 시작하여 2020년 1월 5일에 마무리되었다. 해당 장소에서 주의 깊게 볼 수 있는 점은 단체 내에서 두 개의 집단을 이뤄 내분과 대립, 갈등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 대립 중인 그 장소에 대해 리서치(research)하고 논쟁들을 기록한 데이터베이스를 이용하여 드로잉, 설치, 사운드, 사진, 그리고 영상 등으로 확장하여 작업하고 있다.

작가의 작업에서 핵심적인 요소인 데이터베이스와 변환에 대해 말해보자. 첫번째, 데이터베이스는 2018년도를 기점으로 일주일에 한번 정해진 장소에서 약속된 시간인 오전 11:00를 기점으로 약 1시간 동안의 녹음파일들이 누적된 것이다. 날짜, 시간, 일주일 정도 차이나는 무수히 많은 시간들이 모여 하나의 정체성을 이루는 것이다. 다음으로 두번째, ‘변환’은 집단 정체성의 혼란으로 정의한다.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변환(변화)은 혼란을 야기하며, 이 집단은 집단 구성원이 모인 근본적인 목적과 결부된 장소적 측면으로 봤을 때 정체성을 상실했다고 본다.

퍼포먼스 : 송화목

데이터베이스, 즉 집단 정체성은 변환되어 정체성과 장소의 교차를 보여준다. 이것이 작업이 될 때 집단 데이터의 변환은 또 다른 변형을 가져오며 새로운 변화를 야기한다. 숭고하고 신성한 장소와 그 역할을 상실한 정체성의 부조화는 집단 내 분열을 일으킴으로써, 사회적이고 또 사회이며, 지독히 사회적인 사회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과연 이것을 어느 집단의 이야깃거리로만 볼 수 있을까?

특정 장소에서 파생된 두 집단과 중간 지점에 있는 내부 구성원들, 이 세 가지의 구도는 서로 부조화를 이루나 공존하고 있다. 데이터베이스에 축적된 집단 간의 갈등은 내부적인 불안감을 만들어 내며, 집단 구성원들의 심리적 압박감을 조성한다. 갈등으로 인해 본래의 목적과는 다르게 가치관과 이상이 변형되어 변형 집단을 이루는데, 이는 인간관계에서 서로 작은 집단을 이루고 그 집단이 거대한 단위의 집단이 될 때도 이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피아노 연주가 시작되는 순간 잔존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사운드들이 서로 주장하며 전시장 안의 사운드와 피아노 연주가 섞여 반대되는 과정이 일어날 때, 그리고 그것을 보는 관객이 있을 때 작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분명해진다.

_작가 노트

전시장 벽면 드로잉, 녹음된 데이터베이스로부터 나온 이미지와 콜라주, 가변설치, 2020

<김채원의 작업이 말하고자 하는 것>

‘살아있는 사람을 짓누르는 악몽 같은 역사가 있다면, 사람들은 몸을 흔들어 잠에서 깨어나, 그런 악몽의 역사에서 벗어나려 할 것이다. 할 수만 있다면 그런 잠에서는 깨어나는 것이 자연스럽다.’

– 캐슬린 로드(Catherine Lord), 「무엇이 전설을 만들었나 : 짧고 슬픈 다이안 아버스의 삶」 중에서-

젊은 작가 김채원의 작업 <집단데이터의 변환>은 누군가를 짓누르는 악몽, 혹은 심리적 흉터에서 비롯된 그 몹쓸 잠에서 벗어나려는 자연스러운 의지에서 시작되었다. 그래서 작가의 작업은 짓누르는 악몽이나 심리적 흉터와 연루된 특정한 ‘집합공동체’의 어떤 ‘데이터’를 ‘수집’, ‘재생’, ‘변환’하는 레퍼런스 의존적 리서치기반이 형식적 특징이다.

2018년부터 2020년 초까지 진행된 이 작업은, 대한민국 전라북도 k군에 위치한 특정 교회에서 2년여 동안 주 1회 100여주 1시간 가량의 예배를 하나의 사건으로 특정하고 녹음한 음성데이터가 주 레퍼런스이다. 음성데이터는, 일주일에 한번 동일한 장소와 동일한 시간대에 모이는 교회(사람들)의 특정한 예배시간(의 소리)를 녹음한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이 1차 데이터를 그야말로 레퍼런스로서 채택하고 있으며, 이것을 전혀 다른 매체인 드로잉, 사운드 설치, 음악, 영상 그리고 퍼포먼스 등으로 ‘변환’하여 제시하고 있다.

‘변환’ 이전 1차 데이터 속 음성들은, 남성과 여성, 어른과 아이, 사제와 신자 등의 젠더나 연령, 혹은 집단 내 직위 등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적어도 같은 공동체 혹은 그들의 주변사람이라면 음성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쉽게 알 수 있다. 날것 그대로의 1차 데이터는 작가에 과감한 시도 아래 사운드, 영상, 퍼포먼스 등 전혀 다른 매체로의 ‘변환’과정을 거치면서 변화된 국면과 맥락 안에 위치하게 된다. 예컨대 1차 녹음된 데이터를 한번 혹은 두 번, 세 번 등의 각기 새로운 ‘변환’과정으로 재생한 작업을 함께 설치한 <3′>이 대표적이다. <3′>는 각기 다른 ‘변환’과정을 거친 작업들로 구성되었다. 프로그램을 통해 백 마스킹 되어 섞이고 엉켜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리들로 변환된 음성작업과 이를 다시 수백 장의 악보로 또 변환시켜 전시장 바닥에 무질서하게 쌓아놓은 종이설치 작업은 이들 악보를 편곡, 연주하는 피아노 사운드와 함께 공명하고 있다. 이 작업에서 눈여겨 볼 것은 바로 작가에 의해 1차 데이터 속 음성들이 수차례의 정체를 세탁하는 ‘익명화’ 과정을 거친다는 사실이다. 이는 각기 다른 프로그램을 통한 ‘변환’에 의해 맥락이 변화함에 따라 새로운 정체로 거듭 재현되고 있다.

드로잉2, 녹음된 데이터베이스로부터 나온 이미지와 콜라주, 30.5×23(cm), 2020

드로잉3, 녹음된 데이터베이스로부터 나온 이미지와 콜라주, 30.5×23(cm), 2020

녹음된 데이터베이스로부터 나온 <드로잉>연작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1차 데이터의 변환 이미지의 콜라주인 이들 작업은 오선에 그려졌으나 하모니를 전제한 음악이라 할 수 없는 악보들의 파편과 아주 작은 크기 탓에 읽을 수 없는 텍스트 조각이 작가의 드로잉과 함께 콜라주되있다. 악보이되 음악이 아니고 텍스트이되 읽을 수 없는 조각들의 콜라주는 음악인지 글인지 그림인지를 불명확하게 만듦으로써 관객을 당혹케 한다. 근원적인 차원에서 이러한 위반은 k군의 어느 교회라는 특정한 집합공동체(데이터베이스)를 레퍼런스 삼아 연속적인 ‘변환’을 시도하는 김채원의 작업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짐작케 한다.

사실, 작가 작업의 레퍼런스였던 교회는 신의 무한한 사랑과 평화를 상징하는 ‘종교’라는 고정되고 관념화된 정체성을 부여받은 곳이다. 김채원 역시 교회의 일원으로 리서치 기간이던 당시는 교회 내의 갈등과 대립, 반목의 음성들이 잦았던 때였다. 일반적인 사회공동체에서 일어난 고조된 갈등의 음성이 아닌 ‘신의 장소=교회’라는 사회적인 고정관념을 위반하는 교회 내 불협화음은, 작가로 하여금 집단과 개인에게 부여되는 고정관념의 근본적인 실체에 대해 질문하게 하였던 것 같다. 우리 사회 내의 고정관념화된 정체성과 끊임없이 변화하는 실존적 정체성 간의 간극을 경험한 김채원은 1차 데이터의 연속적인 ‘익명화’ 과정의 수행을 실천함으로써 자신의 작업이 특정한 교회나 종교 내 사건을 리포트하기 위한 르뽀식 차원을 떠나 있음을 전한다. 이는 학교, 정당, 젠더, 국가, 민족, 인종 등 특정한 정체성을 강요받아 온 현대사회의 경직된 구조와 이분화된 상황이 강요하는 심리적 압박에 대한 고발이자 은유일 수 있다. 작가는 나아가 ‘정체성은 고정되거나 일관적인가.’ ‘정체성 구축에 영향을 미치는 힘은 안정된 것인가’를 질문한다.

유동적이고 단순화할 수없는 집단 혹은 개인의 정체성 문제는 김채원에 의해 수집된 데이터들의 재생, 변환 등의 과정 속에서 그 어느 것 하나 동일하지 않은 결과물로서의 작업들이 증명하고 있다. 사회 구성체라는 공동체는 그것이 종교, 정치, 학교 등을 불문하고 서로 섞이며 교환과 적응이라는 과정에 지속적으로 관여한다. 그리하여 정체성 구축에 영향을 미치는 힘은 안정된 것이 아니므로, 정체성 자체는 끊임없이 변화한다. 다시 말해서, 분, 초, 시간, 주, 달 등의 일상적 단위와 맥락이 시간의 흐름과 함께 변화함에 따라 공동체 혹은 개인의 정체성 역시 유동적이고 변형 가능한 것이다.

현대사회가 강요해 온 정체성과 같은 고정관념은 캐서린 로드가 얘기하는 ‘살아있는 사람을 짓누르는 악몽 같은 역사’와도 같다. 여기서 김채원의 작업이 지닌 미덕이 분명해 진다. 사람들의 몸을 흔들어 ‘그런 악몽의 역사’ 그 몹쓸 잠에서 벗어날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서사와 담론의 적절한 혼용과 균형유지를 시도하면서 예술이 결국 도달하고자 하는 미학적 가능성을 환기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글/김주원(대전시립미술관 학예연구실장)

김채원 Kim Chaewon

cy5588@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