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은 소중히 간직함도 내버리는 것도 아닌 ‘보관’의 의미를 갖고, 본인은 그것을 목격하는 사람들에게서 발생한 모든 새로운 (혹은 익숙해서 괴로운) 인상을 수집하며 그들의 수만큼 세계가 확장되도록 만들고자 한다, 어린아이들 사이에 소문이 퍼지듯. 그들은 언제든 서로의 위치를 바꿀 준비가 되어 있다. 그때 그때 다른 공간에 배치되고, 다른 아이와 맞붙어 길게 변하거나 오히려 짧아지기도 한다. 낯선 구석에 심긴 후 새로운 선을 그이기도, 반대로 잘라내어지기도 한다.
이것은 완결되지 못한 이야기이다. 사람이 언젠가 느꼈던 기시감, 기억의 재현, 알지만 모르는 아득한 컨텍스트들. 그 앞에 무슨 전제가 있었는지,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명시되지 않은 ‘어떤 맥락’이다. 분명치 않은 맥락의 틈새에서 방문자는 그의 기억과 경험에 따라 제각기 다른 유령을 본다. 그렇기 때문에 철저히 개인적으로 쓰였을 그 글과 그림들은 엄밀하게 완전한 일기는 될 수 없다, 도시괴담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타자의 이해를 염두에 두지 않는 삭제와 재편집에 의해 문장은, 개인의 의사표현과는 별개인 모호한 어감 자체로 변화함과 동시에 그 목적성을 희석당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사람이 일으키는 기이한 흐름, 사람이 살아가고 공기가 흐르면서 발생하는 투명의 밀도가 생명을 얻는 과정이며 인간이 그 존재를 믿음으로써 형태를 가지게 된 밀도는 기억-공포-일의 발단과 종료-치유 등 다양한 종류의 작용을 내포한다.
우연이든 맘을 잡았든 어느 날 어떤 문장을 접하게 된 그 누군가는 그것으로 잊었던 과거를 되새길 수도, 읽을까 고민하던 책을 자리 잡고 읽어 볼 수도, 그날 밤 이상한 꿈을 꾸게 될 수도 있다. 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 그것은 구원도, 오지랖도 아닌, 그저 모든 자연물이 각자 먹이를 먹거나 둥지를 지을 뿐이지만 어느새 서로의 이해관계를 충족시키며 거대한 회전에 올라 타 있는 작용과도 같은 것으로서.
그 불확실성에서 무한한 가능성을 느꼈다. 언어는 음과 만나 영상을 남기고, 어느 말을 앞에 두거나 심지어는 제외 해 버리느냐에 따라 온갖 종류의 공기를 전달할 수 있다. 그렇기에 어떤 종류의 예술은 당연히 글을 포함한다. 그리고 그렇게 이루어진 문장의 숲은, 언어적 기능은 남아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무엇인가 읽히도록 만들지만 조형적 기능 또한 수행하는 어떤 것이 된다.
분명 언어였을 터인, 어떤 이미지가 된다.
Song Dabin
2017 충남대학교 예술대학 회화과 졸업
개인전
2017 ARTLAB DAEJEON展, 이응노 미술관, 대전
단체전
2017 PANDEMIC展, 예술가의 집, 대전
2016 중동을 비추다 – 예술가의 방展, 중동 작은미술관, 대전
2015-2016 풀이展, 백마아트홀, 대전
https://www.instagram.com/morian.that.nobody.knows/
E-Mail : u16u16@naver.com
전시기간 : 4.28-5.7
관람시간 : 오후 1시-7시
별도의 오프닝은 없습니다.